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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글씨

문경 봉암사 백운대(白雲臺)와 주변 암각서(岩刻書)

by 장천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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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聞慶) 희양산(曦陽山) 아래 자리잡고 있는 봉암사(鳳巖寺).

진범 주지스님께서 여름에는 유난히 더운 곳이 이곳 봉암사라고 말씀을 하셔서 봉암사 뒷산 희양산(曦陽山)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산이라 그곳에 햇볕이 반사되어 경내를 비추니 더 더울 수 밖에 없겠구나 생각을 하며 한자를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曦(희)' 햇볕 희에 '陽(양)' 볕양이라, 두 글자 모두가 햇볕이니 오죽 볕이 심하게 내리쬐면 햇볕햇볕산이라 했을까.

 

희양산(曦陽山) 아래 자리잡고 있는 봉암사(鳳巖寺)

 

봉암사 전경

 

문경 봉암사 초입 버스 정류장부근 개울에 빨래터가 있는데, 그 대(臺) 앞 바위의 세로 면에 '夜遊岩(야유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암각서(岩刻書) 글씨를 최치원이 썼다고 전하는데,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대동금석명고(大東金石名攷)」에는 장소를 진주 지리산으로 적고 있으나 『조선금석총람』에 적힌 쌍구서(雙鉤書)를 보면 봉암사 ‘야유암’의 암각서와 동일하므로 편자(編者)가 장소를 잘못 기재한 것 같다.

이 ‘야유암’ 암각서는 자경이 30㎝정도의 대자로서 초서로 새겨져 있으나 자형의 향배가 균일하고 골기가 있으며 필세가 강직하여 다른 암각서들과 달리 결구(結構)가 잘 짜여져 단아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최치원의 초서로 단정지을 수 있는 대자(大字)의 글씨가 없어 비교할 수는 없으나 빼어난 서체임에는 틀림이 없다.

 

참고 : 『海東金石苑』, p.45, "唐新羅崔孤雲夜遊岩三大字 磨崖字徑一尺五寸行書 右刻在朝鮮慶尙道晉州牧 智異山石壁上無年月相傳爲崔致遠書"

「大東金石名攷」, “夜遊岩三大字 仝 晉州智異山”

『朝鮮金石總覽』, p.106, "聞慶 夜遊岩石刻 所在 慶尙北道聞慶郡加恩面院北里 刻面縱二尺二寸橫四尺四寸字徑一尺五寸草書"

 

'夜遊岩(야유암)' 암각서가 보이는 전경
夜遊岩(야유암) 암각서

 

그 밖에도 '야유암' 암각서 위에 '取適臺(취적대)' 암각서가 있는데, 글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되어 있는데, 현재로서는 누가 썼다는 기록은 없고 월곡 오원(吳瑗 1700~1740)이 1723년에 쓴 호좌일기에 보이나 연원은 찾을 길이 없다.

 

참고 : 문경시 문화예술과,『희양산 봉암사』「최치원 유적지 주변 입지 및 역사문화환경」, 문경문화연구총서 7집, 2011.

 

 

取適臺(취적대) 암각서

 

그 외에도 야유암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300m지점, 논밭 사이의 석벽에 ‘高山流水 明月淸風(고산유수 청풍명월)’의 글씨가 자(字)당 약50cm정도 크기의 행서로 쓰여있는데, 이 글씨는 원나라 설암 (雪菴)의 서체에 더 가까워 최치원의 글씨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高山流水 明月淸風(고산유수 청풍명월 ) 암각서
高山流水 明月淸風(고산유수 청풍명월 ) 암각서 부분 '高山'

 

高山流水 明月淸風(고산유수 청풍명월 ) 암각서 부분 '流水'
高山流水 明月淸風(고산유수 청풍명월 ) 암각서 부분 '淸風'
高山流水 明月淸風(고산유수 청풍명월 ) 암각서 부분 '明月'

 

 

마애불좌상 주변 풍경

 

마애불좌상을 중심으로 제일 우측에 있는 큰 바위쪽에 白雲臺' 암각서가 자리하고 있다.

 

마애불좌상

 

봉암사에서 서쪽 기슭으로 약 500m 지점 계곡 마애불 우측면에 '白雲臺(백운대)’ 암각서가  우에서 좌로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 글씨 또한 많이들 최치원의 글씨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무릉잡고(武陵雜稿)' 에 보면, 허암( 虛庵)이 '白雲臺'라 짓고 썼다고 되어 있다. 글씨는 초서체로 획이 부드러우면서 다소 늘어져 있어 긴장감이 덜하다. 

 

武陵雜稿卷之四 別集 詩 白雲臺。次虛庵韻。

謾說丹丘勝。誰知有玉丘。寺後有洞。平鋪白石。可坐百餘人。迥臨洞府。虛庵名曰白雲臺。眞如玉局。 天靑恢八宇。雲白閱千秋。護洞龍挐足。擎曦鳳擧頭。曦陽山。有龍岑鳳巖。 神仙如未妄。應向

 

* 허암(虛庵) 정희량(良, 1469-1502) : 조선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동지중추부사 정충석(鄭忠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정침(鄭忱)이고, 아버지는 철원부사 정연경(鄭延慶)이다. 어머니는 경간(慶侃)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벼슬은 예문관봉교, 권지부정자를 역임했다.

 

허암이 지은 '등조령(登鳥嶺)' 시가 있다.

 

새재에 올라(登鳥嶺) -정희량(鄭希良, 1469-1502)

 

一路秋山三尺驢(일로추산삼척려)      단풍 든 새재를 나귀 타고 넘는데

三霜古褐一奚奴(삼상고갈일해노)      세 해 지난 베옷에 몸종 하나뿐

翩翩獨望松風過(편편독망송풍과)      나는 새 바라보며 솔바람 맞노라니

此是詩人出峽圖(차시시인출협도)      내 모습 그야말로 그림 속 시인

 

 

白雲臺(백운대 )  암각서

 

이 백운대 암각서 옆 바위에는 불공계(佛供禊)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봉암사 불사를 위해 시주를 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보이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크고 넓은 바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불공계를 새긴 해가 왼쪽 아래에 있는데, 대정2년 4월 8일(大正二年四月八日)이라 대정2년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이고 이 불공계를 주도한 사람의 이름이 화주 이석원(化主李石園)이다.

이로써 다른 바위에 쓰여져 있던 석원(石園)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그는 바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서 봉암사 주지로 임명되었던 이석원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은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11년 12월 2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의 주지취직인가(住持就職認可)에 보면 1911년 12월 19일에 문경군 봉암사 이석원(聞康郡 鳳巖寺 李石園)이라고 되어 있다. 이석원이 봉암사 주지로 취임한 것이다.

 

참고 : [박태근의 이야기가 있는 여행] 문경봉암사 편

 

'백운대' 좌측 바위 불공계(佛供禊) 암각서
불공계 말미, 大正二年四月八日(1913년) 化主李石園
'石圓(석원)' 암각서

 

백운대 우측 바위에 새겨진 '石圓(석원)' 암각서, 불공계를 통해 '석원'은 주지 이석원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退隱(퇴은)' 암각서

 

'退隱(퇴은)' 은 은퇴하여 조용히 지낸다는 의미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16~17세기 설암체를 바탕으로 한 엄정하고 강건한 필세의 해서체임을 알 수 있다. 

 

蘂南居士(예남거사) 암각서

 

'蘂南居士 沈能國 過此 己巳九月 日(예남거사 심능국 과차 기사구월 일)'

'석원' 암각서 우측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예남거사는 조선시대 문신 이하원(李夏源, 1664~1747)의 호로 심능국과 이곳을 지나다가 기사년 구월 모일에 새겼다는 뜻이다.  '심능국'의 묘가 경기 연천에 있는데, 청송(靑松)사람이며 문묘직원(文廟直員)을 지냈다는 정도의 정보가 있어 아마도 이하원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조금 어린 정도지 않나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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