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을 움직이는 글씨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서호(西湖)에 위치한 서령인사(西泠印社)

by 장천 2024. 7. 2.
728x90

서호(西湖)

 

앞에 보이는 황금색 전각이 '누외루(樓外樓)'의 물고기 양식장 서호의 물고기는 오로지 누외루에서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누외루(樓外樓)는 서호에 있는 유명한 식당이다.

 
고산(孤山)이 있는 유람선 선착장에 내려 서호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좌측에  누외루(樓外樓) 고급 식당이 나오고, 약 500여 미터 정도 걷다보면, 좌측에  서령인사(西泠印社)가 나온다. 
 

서령인사(西泠印社) 출입구
'서령인사(西泠印社) ' 글씨는 절강성박물관장을 지낸 사맹해(沙孟海, 1900-1992)

 
■사맹해(沙孟海, 1900-1992)
지장성(折江省) 닝보(寧波) 출신으로 서예가이자 전각가.
1929년 国立中山大学 국문과 교수
1932년에는 중화민국 교육부 장관
1949년 浙江大学 중국어학과 교수
1952년 저장성 문물관리위원회 상임위원
1963년 任浙江美术学院 书法篆刻专业 교수
1979년 서령인사 회장으로 선출.
1980년 서령서화원 원장
1981년 저장성박물관 명예관장
1981년 중국서예가협회 부회장
1982년 중국서예가협회 저장성 지부 회장
1989년 저장성 미술학원(현 중국미술원)의 종신교수
1992년 항저우에서 사망

'서령인사(西泠印社) ' 안내판

 
안내판 번역문.

西泠印社是西湖文化景观中的近代代表性史迹,中国最早的全国性金石篆刻研究学術團體. 始创于清光绪三十年(1904),以“保存金石,研究印学”为宗旨。社址自创建以来规模不断扩大,历经维修而保存至今。总体布局可分为山前、前山、山顶和后 山共四组园林建筑群。其间点缀着石塔、经幢、造像、泉池等古迹。其中,“汉三老讳字忌日碑”是浙江省迄今发现的最早碑石。社址依山而建,布局精巧,景致幽绝,有“占湖山之胜,撷金石之华”的美誉。2001年6月,国务院公布西泠印社为全国重点文 物保护单位。

서령인사는 서호문화경관의 근대적 대표 유적지으로 중국 최초의 전국적인 금석과 전각 연구 학술단체이다. 청나라 광서 30년(1904년)에 '금석과 전각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서령인사는 창건이래 지속적으로 규모를 확장해 왔으며, 보수를 거쳐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서령사의 전체 구성은 산전(山前), 앞산, 산 꼭대기, 그리고 뒷면의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석탑, 조각품을 보관한 경당(經幢), 동상, 천지(泉池)등의 유적지가 있다. 그 중 '한삼로휘자기일비(汉三老讳字忌日碑)'는 지금까지 저장성에서 발견된 최초의 비석이다. 서령인사 부지는 산을 배경으로 지어져 배치가 정교하고 경치가 한적하여 "호수와 산을 활용한 경승(景勝)이요 금석(金石)의 정화(精華)이다"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2001년 6월, 국무원은 서령인사를 국가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했다.
 
 

'한삼로석실(漢三老石室)'

 

'한삼로휘자기일비(漢三老讳字忌日碑)' 탁본


 
서령인사(西泠印社)는 중국 청말에 항주에서 조직된 전각가(篆刻家)의 조직으로 항주 서호의 고산(孤山)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서30년(1904) 오은, 정인, 엽명, 왕시 등이 발기, 오창석이 1대 사장이 됨. 절파의 전각계가 중심이 되어 인학(印學)에 관한 저서와 명가의 인보(印譜)를 다수 출판하였고 현재에 이르러 한국을 비롯하여 주변국에도 회원을 두어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부지면적 7088㎡, 연건축면적은 1749㎡이며, 명·청 시대의 고적(古蹟)과 빼어난 원림(園林)으로도 유명하다. 백당(柏堂)·죽각(竹閣)·앙현정(仰賢亭)·사조각(四照閣)·제금관(題襟館)·관악루(觀樂樓)·환박정려(還朴精廬)·화엄경탑(華嚴經塔) 등의 건물이 지세를 따라 들쑥날쑥 분포되어 있다. 건물 사이에는 인천(印泉)·한천(閑泉)·잠천(潛泉) 등의 샘이 있어 그윽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정자와 누각에는 청나라 때 전각가(篆刻家)로 이름난 정경(丁敬)의 필적을 새긴 석각 등이 있고, 암벽에는 역대 명사(名士)들이 남긴 마애제기(磨崖題記)가 있다. 또 삼로석실(三老石室)에는 동한(東漢) 때의 〈삼로휘자기일비(三老諱字忌日碑)〉와 역대의 비각(碑刻) 등 가치 있는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2001년 6월 근대 및 현대 사적으로서의 중요성과 건축의 대표성을 인정받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참조)
 
左侧
三老德业赫烈,克命先己,汁稽履仁,难名兮而右九孙。日月亏代,犹元风力射,┘邯及所识祖讳,钦显后嗣,盖《春秋》义,言不及尊,翼上也。念高祖至九子未远,所讳┘不列,言事触忌,贵所出严及焉,敬晓末孙,冀副祖德焉。┘

 

右侧
第一格
三老讳通,字小父,┘庚午忌日。┘祖母失讳,字宗君,┘癸未忌日。┘
第二格
掾讳忽,字子仪,┘建武十七年岁在辛┘丑四月五日辛卯忌日;┘母讳捐,字谒君,┘建武廿八年岁在壬┘子五月十日甲戌忌日。┘
第三格
伯子玄,曰大孙;┘次子但,曰仲城;┘次子纡,曰子渊;┘次子提余,曰伯老;┘次子持侯,曰仲雍;┘次子盆,曰少河;┘
第四格
次子邯,曰子南;┘次子士,曰元士;┘次子富,曰少元;┘子女曰元名;┘次女反,曰君明。┘

 

삼로비 초벌

西泠印社是西湖文化景观中的近代代表性史迹,中国最早的全国性金石篆刻研究学術團體. 始创于清光绪三十年(1904),以“保存金石,研究印学”为宗旨。社址自创建以来规模不断扩大,历经维修而保存至今。总体布局可分为山前、前山、山顶和后 山共四组园林建筑群。其间点缀着石塔、经幢、造像、泉池等古迹。其中,“汉三老讳字忌日碑”是浙江省迄今发现的最早碑石。社址依山而建,布局精巧,景致幽绝,有“占湖山之胜,撷金石之华”的美誉。2001年6月,国务院公布西泠印社为全国重点文 物保护单位。

서령인사는 서호문화경관의 근대적 대표 유적지으로 중국 최초의 전국적인 금석과 전각 연구 학술단체이다. 청나라 광서 30년(1904년)에 '금석과 전각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서령인사는 창건이래 지속적으로 규모를 확장해 왔으며, 보수를 거쳐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서령사의 전체 구성은 산전(山前), 앞산, 산 꼭대기, 그리고 뒷면의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석탑, 조각품을 보관한 경당(經幢), 동상, 천지(泉池)등의 유적지가 있다. 그 중 '한삼로휘자기일비(汉三老讳字忌日碑)'는 지금까지 저장성에서 발견된 최초의 비석이다. 서령인사 부지는 산을 배경으로 지어져 배치가 정교하고 경치가 한적하여 "호수와 산을 활용한 경승(景勝)이요 금석(金石)의 정화(精華)이다"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2001년 6월, 국무원은 서령인사를 국가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했다.
汉三老碑,全称“汉三老讳字忌日记刻石”,约刻成于东汉建武二十八年,即公元52年。清咸丰二年(1852),出土于浙江余姚客星山下,为近村严陵坞周世熊所得。清咸丰十一年(1861),太平天国军攻陷余姚,此碑被义军扑地起灶,幸碑文未受到大的损伤。1921年,此碑辗转至上海,沪上外商闻之欲出重金收购,事 为浙江同乡沈宝昌、姚配石获悉,后经西泠社社首任社长吴昌硕等积极呼吁,同乡募捐集8000金购得此碑,并在西泠印社筑石室永久保存。
三老碑出土时碑额已断失,现存碑高91厘米,宽45厘米,碑形长方,四周俱以损坏,成不规则曲线状。碑面文字有界框,框高23.5厘米,宽36厘米。框内以界线 分左右两直列,右框再横向界分成四块,刻三老“通”祖孙三代的名字及祖、父辈忌日。左框分三直行刻立碑本义一篇。碑文共217字。碑文释意:祖父任三老官 职,名通,字小父,庚午日故世。祖母名已不传,字宗君,癸亥日故世。父亲任官府正职属官,名忽,字子仪,东汉建武十七年(公元41年),时在辛丑四月五日辛酉 日故世。长子名玄,字大孙。二子名但,字仲城。三子名纡,字子渊。四子名提馀,字伯老。五子名持侯,字仲雍。六子名盆,字少河。七子名邯,字伯南。八子名土,字元土。九子名富,字少元。长女名无名。二女名反,字君期。祖父任职三老,品德功业显赫,胜任上命,严格要求自己,协力议行仁政,祖父功业盛大真是说不完。而右刻名于碑的我们九个子孙,虽岁月不居,年龄渐长,但祖父的光辉德业,就像向远方射出的箭一样,始终指引着我们。我第七孙邯,将知道先辈的名字, 刻在碑上让后来的子孙知道,因为古代先哲说,后人是在先辈的羽翼覆蔽养育下成长的,小辈不可以直呼他们的尊名。看到祖辈去世时光尚不远,但他们的讳字忌日 已将遗忘,所以小辈说话做事往往触犯忌讳。现在重要的是要列明忌讳,才能严格遵行,把这个道理告诉后来的子孙,希望他们能符合祖辈躬行的德业啊。

한삼노인비(한삼노인비)의 정식 명칭은 '한삼노휘자기일기각석(汉三老讳字忌日记刻石)'으로 동한 건무 28년경에 조각된 것으로, 즉 서기 52년이다. 청나라 함풍 2년(1852년) 절강성 여요(浙江余姚) 객성산(客星山) 기슭에서 발굴되어 인근 마을인 연령오, 주석웅(严陵坞, 周世熊)이 습득했다. 청나라 함풍 11년(1861년) 태평천국군이 여요를 함락시켰고, 비문은 반군에 의해 땅에 던져졌으나 다행히 비문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1921년에 이 기념물은 상하이로 이전되었고 상하이의 외국 사업가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많은 돈을 지불하여 그것을 구입하려고 했다. 그 후 서령인사의 초대 회장인 심배창과 요배석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창석 등이 적극적으로 호소했고, 마을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이 비석을 구입하고 서령인사에 석실을 지어 영구 보존했다.
삼로비(三老碑) 출토 당시 비석의 이마 부분이 부러져 있었으며, 기존 비석은 높이 91cm, 너비 45c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사방이 훼손되어 불규칙한 곡선 모양을 하고 있다. 비석의 글자는 높이 23.5cm, 너비 36cm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틀은 좌우 두 줄로 직선으로 나누고, 오른쪽 틀에는 가로로 4등분하여 세 노인과 할아버지 및 손자 3대의 이름과 할아버지 및 아버지의 사망일을 새겼다. 왼쪽 틀은 일직선으로 3줄로 나누어 비석의 본래 의미를 기술한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총 217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비문의 의미: 나의 할아버지는 산로관(San Lao Guan)의 직위를 맡았으며, 그의 이름은 소부(孝富)였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종군(宗君)이라는 의호를 받았다. 귀해일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관료로서 이름은 호(胡)이고 예명은 자의(子夷)이다. 큰 아들의 이름은 현이고 자는 대손이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단(Dan)이고 예명은 충성(忠成)이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우(玉)이고 예명은 자원(紫源)이다. 넷째 아들의 이름은 자여(Tiyu)이고, 자는 백로(Bo Lao)이다. 다섯째 아들의 이름은 지후이고 예명은 중옹이다. 여섯째 아들의 이름은 분이고 예명은 소하이다. 일곱째 아들의 이름은 한, 예명은 백난이다. 여덟 아들의 이름은 토이고 자는 원사이다.....다. 큰 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판(Fan)이고 예명은 준치(Junqi)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삼로 중 한 분이셨고, 뛰어난 도덕성과 뛰어난 업적을 갖고 계셨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셨고, 자비로운 조정을 구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셨다. 그리고 오른쪽 비석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우리 아홉 명의 후손들은 비록 함께 살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덕은 먼 곳을 쏘는 화살과 같아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일곱째 형제인 한은 우리 조상들의 이름을 알고 비석에 새겨 후손들이 알 수 있게 했다. 옛 성인들이 말하기를 후손은 조상의 날개 아래서 자라나니 후대는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의 죽음이 멀지 않으나 조상들의 금기시하는 말과 기일은 잊어버렸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말하거나 행동할 때 금기를 어기는 경우가 많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금기 사항을 엄격히 준수할 수 있도록 나열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조상들이 실천했던 미덕을 따르기를 바라며 후세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서령인사(西泠印社)
'인인서랑(印人書廊) ' 은 계공(啓功, 1912-2005) 글씨
인인서랑기(印人書廊記)
백당(柏堂)
금석수(金石壽)
저도 여기서 인생샷 한 컷 찍었습니다.
량당(凉堂)
서령인사(西泠印社)
화엄경탑과 연못
일대종사(一代宗師) 오창석 흉상, 이곳 흉상은 일본에서 오창석을 추모하는 의미로 만들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절강성(浙江省) 효풍현(孝豐縣) 장오촌(鄣吳村) 사람으로 본명은 준(俊), 자는 창석(昌碩), 호는 부려(缶廬), 고철(苦鐵)이다. 청(淸)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서법가(書法家), 전각가(篆刻家)이다. 후해파(後海派)의 대표적 인물로 임백년(任伯年), 포화(蒲華), 허곡(虛穀)과 더불어 ‘청말해파사대가(清末海派四大家)’로 일컬어진다.
 
동치(同治) 4년(1865)에 수재(秀才)로 뽑혀 강소성(江蘇省) 안동현지(安東縣知)로 임명되었으나, 단지 1개월 뒤에 그만두었다. 그 후에 소주와 상해 일대에 거주하면서 역대 금석비판(金石碑版), 새인(璽印), 자화(字畫) 등을 열람하면서 안목을 넓혔다. 더불어 시(詩), 서(書), 화(畫), 인(印) 방면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3년에 항주(杭州) 서령인사(西泠印社)를 만들어 사장을 지냈다.
 
저서로 《오창석화집(吳昌碩畫集)》, 《오창석작품집(吳昌碩作品集)》, 《고철쇄금(苦鐵碎金)》, 《부려근묵(缶廬近墨)》, 《오창석인보(吳蒼石印譜)》, 《부려인존(缶廬印存)》, 《부려집(缶廬集)》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현재 오창석은 중국 근대 대표 화가의 한사람으로 또 전각(篆刻)과 전서(篆書)체에 뛰어난 인물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를 좋아하는 자가 많다. 특히 서화가이자 문화재 감식가로 유명한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에 의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인인인랑(印人印廊), 유강(劉江) 글씨
여고위도(與古爲徒)
이문회우(以文會友)
오창석 서적
삼로석실(三老石室)에는 동한(東漢) 때의 〈삼로휘자기일비(三老諱字忌日碑)〉와 역대의 비각(碑刻) 등 가치 있는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소용홍동(小龍泓洞)
죽각(竹閣)

 
서령인사기(西泠印社記) _吳昌碩
 
서령(西泠)은 산수가 맑고 좋아서 사람들이 재예(才藝)가 많으니 서화(書畫) 외에 전각(篆刻)으로 유명한 사람이 정두정(丁鈍丁)으로부터 조비암(趙悲盦)에 이르기까지 10여 인이 있어 그 유풍(流風)이 남아 고루 내엽(來葉)에까지 끼쳤으니 인학(印學)자로 말하더라도 지금 서령(西泠)이 가장 성행(盛行)하였다.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고 아울러 둔정(鈍丁)과 비암(悲盦) 등 여러 선생들의 상(像)을 돌에 새겨서 우러러 사모(思慕)하고 관마 (觀摩:모범으로 하여 배움) 할 곳을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서령인사(西泠印社)라고 했다.
 
인사(印社)가 있는 곳은 나의 서백당(嶼柏堂)에 가까워 풍경(風景)이 고요하고 뛰어나 자금을 모으고 계획하여 갑진(甲辰)년에 착공하여 계축(癸丑)년에 완성하였다. 당사(堂舍)의 화목(花木)이 여기저기 알맞게 배치되어 모두가 좋으니 이에 정보지(丁輔之)군과 왕유계(王維季)군 오석잠(吳石潛)군 엽품삼(葉品三)등이 집을 짓고 약속하여 동지(同志)를 수집하니 인사(印社)에 들어온 자가 더욱 많았다.
 
임자(壬子)년 9월에 인사(印社)를 열고 외관과 내용이 구비되어 질서(秩序) 정연히 술을 마시고. 시를 읊어 즐겁게 노니 참으로 풍아(風雅)한 모임이요 성대한 행사였다. 인장(印章)을 차는 것은 육국(六國)시대에 보이고 진(秦)대에 나타나서 한(漢)대에 성행하였다.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의 구별이 있었고 옥(玊)에 새기고 쇳물을 틀어 넣어서 만들고 간혹 서각(犀角)이나 상아(象牙)로 만들었으니 원(元)대에 이르러 비로소 화부석(華浮石)으로 만들었다. 각자 자기 뜻에 따라 칼을 사용함으로 마침내 유파(流派)가 나뉘어졌으니 둔정( 鈍丁) 등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절파(浙派)의 영수(領袖)가 되고 절파(浙派)가 세상에 성행(盛行)하여 사(社)를 세운 것은 생각건대 유례가 있으리라 사(社)를생각하여 보건대 서령(西泠)이라 하였으나 그 지방뿐만이 아니고 진인(秦印)과 한인(漢印)은 물론이고 정(鼎)이나 이기(器)며 비갈(碑碣)로서 문자가 있는 것은 모두를 수장하여 박람(博覽)과 고증(攷證)에 바탕을 삼고자 많을수록 더 좋으니 그 속에 들어가면 어부(御府)에 소장한 것을 찾는 것 같아서 취할 것이 한없이 많고 이용하기에 좋을 것이 없는 것이 없을 만큼 실정(實情)이다. 일찍이 고인이 도장을 관찰(觀察)하건대 이를 사용해서 신의(信義)를 밝게 하였으니 그리하여 인신(印信)이라 불러 위로는 조령(詔令)이나 문서에 옮기고 아래로는 계약(契約)이나 서신(書信)에 이르기까지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서화나 시문에 이르기까지 역시 인을 사용함을 중하게 여기었다. 서화(書畫)의 정묘(精妙)한 것은 인(印)을 얻어서 더욱 생색(生色)이 나고 인(印)이 없으면 그때마다 진품이 아니라고 의심하였으니 인(印)과 서화(書畫)는 본래가 서로 도와서 행하여진 것이다. 서화(書畫)에는 이미 사(社)가 있었으니 인사(印社)를 설립하는 것이 어찌 적어도 가할 것인가? 나는 소시(少時)로부터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인(印)과 하루라도 떨어진 일이 없어 그 원류(源流)와 정변(政變)을 다소나마 알고 있어서 동인들이 나를 잘못 중시하여 사(社)가 이미 완성되고서 나를 추대하여 그 장(長)으로 삼았으나 나는 그중에 한 사람으로 어찌 감히 여러 군자(君子)들의 장이 될 수가 있겠는가? 오직 여러 군자들과 상의하여 산수(山水) 사이에 덕(德)을 닦고 학업에 힘쓸 수가 있게 되어 다만 인인(印人)으로서만 끝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나의 바랄 뿐이다. 갑인(甲寅) 여름 5월 22일 안길(安吉) 오창석(吳昌碩)이 글을 짓고 아울러 쓰노라.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