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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글씨

푸둥(浦東)에 있는 오창석기념관(吳昌碩紀念館)

by 장천 2024.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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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석기념관(吳昌碩紀念館) 정문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오창석은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초명은 준(), 또는 준경(俊卿), 자는 창석(昌碩), 蒼碩蒼石倉石昌石, 호는 부려(缶廬), 고철(苦鐵)이다. ()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서법가(書法家), 전각가(篆刻家)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금속과 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후에 인장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오창석은 항저우에 기반을 둔 "서령인사(西泠印社)"의 1대 회장으로 일했고, 인장 조각을 연구하는데 그 자신을 바쳤습니다. 오창석의 그림은 서위(徐渭)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영향을 받아 중국 전통 회화에서 자유로운 붓질로 꽃을 잘 그렸습니다. 그는 말년에 상하이에 정착했고, 그의 화풍 또한 "후기 상하이 학파"로 분류되었다. 그는 전각은 서예와 중국화로 통합했고, 특별한 예술적 표현을 만들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도 높은 명성을 누렸다. 

저서로 오창석화집(吳昌碩畫集), 오창석작품집(吳昌碩作品集), 고철쇄금(苦鐵碎金), 부려근묵(缶廬近墨), 오창석인보(吳蒼石印譜), 부려인존(缶廬印存), 부려집(缶廬集)등이 있다.

오창석기념관(吳昌碩紀念館) 정문
우측부터 봉침칭수(奉爵稱壽) 아가음생(雅歌吹笙)
기념관 앞 시설물
포동신구문물보호단위(浦東新區文物保護單位) 진계춘주택(陳桂春住宅)

 

[오창석 기념관]

 

오창석 기념관은 상해의 가장 중심부인 푸동(浦东)의 마천루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4년에 지어진 100년 된 고택으로, 1,103의 부지에 당시 명성을 떨쳤던 상인 진계춘(陳桂春)이 거액을 들여 지은 상해 유수의 대저택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옥은 중서합벽의 전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세공이 정교하여 당시 최고의 건축 공법을 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목(南木)과 같은 고급 자재를 사용한 가옥으로 건축 조각 예술이 매우 정교하여 '포동 조화루(浦东雕花楼)'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저택은 중국 전통 사합원의 전형적인 배치로 완전히 대칭적이다. 건물은 천마루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앞뒤 대청이 8, 사랑채가 6대이다. 정청은 모양이 높고 넓으며,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19리터의 枓栱를 사용하였다.

 

건물 입면은 높낮이가 엇갈리는 서양식 삼각형 산꽃담, 맑은 물 벽돌담으로 붉은 벽돌로 선을 구분하였다. 창호는 대부분 중국식 전통 목격부채 형식이며, 내부 석고문의 문머리에 복잡한 권초꽃장식이 있다. 건물에는 유리, 문양 타일, 유약 타일 벽치마 등 당시 최고의 마감 기술이 대거 적용되었으며, 서양식 목장식 선각과 벽난로 등이 다수 활용되어 당시의 선진적인 디자인 조성 공법의 대표주자이다. 각처의 가옥과 창호는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화조·팔준도·평승삼단 외에 양·도리·방에는 삼국지연의이야기 전체를 새기고 있으며, 서양의 백합화·튤립·장미 등의 무늬도 중국 전통 목각 공법으로 전시되어 있다.중국과 서양이 서로 어우러지고 서로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고택은 100년의 세월을 거쳐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중심지로 변했고, 이 건물도 향신사택에서 예술과 역사를 담은 오창석기념관으로 재활용되어 2014년 상해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루자즈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마천루들 속에서, 이 건물은 독특한 문화 기념물로 눈에 띄며, 심플하고 전통적인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전시장 안채

 

우리가 간 날은 오창석의 글씨들만 전시가 되고 있었는데, 분기에 한번씩 전시 테마가 바뀐다고 하네요. 

오창석이 84세에 돌아가셨는데, 이번에 전 해인 83세에 쓰신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주특기인 전서체는 노령에도 여전히 대칭의 미를 제대로 살리며 호방한 붓놀림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색신양화지헌(嗇神養和之軒)
大字 행서체의 대련(對聯)은 매우 든문 작품이다. 出得隨株 入獲和璧(출득수주 입획화벽) 左援鉤帶 右撫劍風(좌원구대 우무검풍)

 

오창석의 예서체 대련은 극히 보기 힘든 희귀본이다. 第堂高嚮西山雨(제당고향서산우) 石領荒流東魯雲(석령황류동노운)
邊柳自耕(변류자경) 涉源入技(섭원입기)
낙관 글씨에 오창석(吳昌碩) 대신 오준경(吳俊卿)이라는 어린시절 이름이 적혀 있다. 오창석은 노년에 오준경(吳俊卿) 을 많이 사용했다.
강기골(疆其骨)
이 작품에서는 창석(倉碩)과 吳俊(오준)을 같이 쓰고 있네요.
一代宗師 沙孟海 題(일대종사 사맹해 제)

 

사맹해(沙孟海, 1900-1992)가 오창석을 일대종사( 一代宗師)로 극존칭을 했네요.

그만큼 오창석은 중국에서 근현대 최고 서화가이자 전각가로 추대가 되고 있습니다.

 

사맹해(沙孟海, 1900-1992)

지장성(折江省) 닝보(寧波) 출신으로 서예가이자 전각가.

1929国立中山大学 국문과 교수

1932년에는 중화민국 교육부 장관

1949浙江大学 중국어학과 교수

1952년 저장성 문물관리위원회 상임위원

1963任浙江美术学院 书法篆刻专业 교수

1979년 서령인사 회장으로 선출.

1980년 서령서화원 원장

1981년 저장성박물관 명예관장

1981년 중국서예가협회 부회장

1982년 중국서예가협회 저장성 지부 회장

1989년 저장성 미술학원(현 중국미술원)의 종신교수

1992년 항저우에서 사망

일대종사(一代宗師) 현판 아래 오창석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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