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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글씨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에서 추사(秋史)를 만나다.

by 장천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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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서예] 12월호에 저번에 중국 곡부 여행을 같이 갔던 김학범 선생님이 쓰신 글이 실렸습니다. 당시 곡부(曲阜) 공자연구원에서 그곳 학자, 관료, 서예가, 교수 등이 모여 筆會를 가졌는데, 그것을 지켜본 김학범 선생님이 저를 너무 띄워주신 글이라 좀 민망합니다만 한 개인의 소외를 적은 것이니 편하게 일독을 권합니다.
*김학범 : 한학자, 내곡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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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에서 추사(秋史)를 만나다.]
- 역사디자인연구소 김학경
2023년 11월 인천공항에 첫눈이 내리던 날 코로나 펜데믹의 여파로 오랫동안 문이 닫혀있던 공자(孔子)의 고향 중국의 곡부(曲阜, 취푸)를 방문하게 되었다. 무우수아카데미 & 무우수갤러리에서 추진하는 ‘곡부 문화 답사 및 무우수갤러리 교류전’ 협의 차 방문길에는 이연숙 무우수갤러리 원장님, 서예가 장천 김성태 선생, 가인 권혁범 선생 등이 동행하였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의 지역이고 출발할 때 서설(瑞雪)이 내리며 초겨울 추위가 엄습해 와서 추위에 대한 걱정이 컸는데 서울과 달리 따스한 날씨가 반겨주었다. 예전에 비해 훨씬 깨끗해지고 잘 단장된 곡부의 모습은 공자의 고향답게 유교와 연관된 다양한 유교 문화 사적들이 즐비하였고 곳곳에 유교문화 유적을 알리는 표지판들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답사 이틀째 이른 아침에 방문한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공묘(孔廟)에는 수학여행을 온 듯한 중국 중학생 또래의 수많은 학생 단체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온 비슷한 복장의 단체 여행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순간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유교 문화를 비판하며 공자의 유적을 훼손하던 홍위병(紅衛兵)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아직도 공묘의 곳곳에 남아 있는 홍위병들이 때려 부순 비석 등의 잘려진 흔적 앞에서 안타까움과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중국 사회주의의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유교 문화의 모습을 보며 격세지감(隔世之感)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는 공묘를 방문한 뒤 ‘공자연구원(孔子硏究院)’을 방문하였다. 본 답사의 목적인 ‘곡부 문화 답사 및 무우수갤러리 교류전’을 위한 협의 이전에 중국 측 인사들과 휘호를 교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은 장천(章川) 김성태(金星泰) 선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곡부의 주요 인사들이 한국에서 명망 있는 서예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휘호를 교환하자는 뜻을 전해와 우호(友好)를 다지기 위한 명분으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하지만 이면에는 서예의 종주국 중국의 모습을 맘껏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방문한 공자연구원은 방대한 면적에 엄청난 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자연구원은 1996년 중국 국무원의 비준으로 설립된 거대한 정부 조직의 하나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의 위상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현 시진핑 중국 주석도 곡부를 방문하면 들른다는 비중 있는 기관이었다. 공자연구원에 비치된 유교와 관련된 엄청난 양의 서적 등 자료를 보며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일부뿐만 아니라 중국 및 세계 각국에서 저술된 유교 관련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의미 있는 곳에서 마련된 한국과 중국 인사 간의 휘호 교환의 자리는 말이 휘호 교환의 자리이지 실질적으로 양국의 기량을 다루는 불꽃 튀는 대결의 자리이기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KBS의 영상 제자(題字)를 책임지고 한국캘리그라피협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장천 김성태 선생이 참여하였으니 우리나라의 대표 서예가가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중국 측에서도 곡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중국 및 해외에서 서화전을 섭렵하고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작가들이 참여하였으니 명실공히 한국과 중국의 서예 경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측 인사 중에는 금문(金文)에 능한 서예가 정국평(鄭國平) 선생, 시인이자 서예가이신 공상위(孔祥偉) 선생 등 실력 있는 서화가(書畵家)들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휘호를 직접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장천 선생은 서울에서 장천주(章川酒)를 가져와서 중국 서화가들과 수작(酬酌)을 하였다. 장천주는 장천 선생의 호를 따서 제작하는 소량 생산의 고급 전통 소주로 중국술과 맛과 향에서 손색없는 술이었다. 먼저 장천주를 한 잔 기울인 장천 선생은 큰 붓 2자루를 거머쥐고 한글로 ‘공자’라는 대자(大字)를 썼다. 장천 선생은 술 한 잔 기울여야 붓을 움직인다며 말 그대로 ‘취서(醉書)’의 호기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중국 유교 문화의 중심에서 한글로 쓴 공자는 우리나라 서예의 기상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힘찬 필체에서 통쾌함마저 일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휘호 교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지 여유롭던 중국 측 서화가들이 장천의 글 쓰는 모습을 보며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이어서 행서(行書) 일념통천(一念通天), 예서(隸書) 이인위미(里仁爲美), 전서(篆書) 우공이산(愚公移山) 등의 모든 필체를 뿜어냈다.
장천 선생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휘호 교류에 참여한 서화가들뿐만 아니라 공자연구원 직원들이 삥 둘러서서 글을 평가하며 감탄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글씨에 감탄하던 중국 측 인사 중 왕심안(王心安) 선생은 대나무〔竹〕를 치고, 정국평(鄭國平) 선생은 단아한 전서를 정성껏 써 내려갔다. 중국 측 인사들의 글씨도 명망대로 탐이 날 만큼 훌륭하고 평가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런데 굳이 경쟁심을 발휘하여 글을 평가할 마음이 없어도 장천의 글씨는 단연 압권이었다. 마침내 장천 선생의 휘호를 지켜보던 공자연구원의 직원들이 다가와 공자연구원에 영원히 소장하기 위한 글을 청하였다. 장천 선생은 ‘수문헌전적장고풍유운(收文獻典籍藏古風儒韻)’이라고 휘호하니 그들의 만족감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순간 내 머릿 속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 선생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200여 년 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당시 청나라 학술계에서 최고로 존경받던 거유(巨儒)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과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선생을 만났다. 완원 선생은 당대에 경학(經學)과 금석학(金石學) 등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옹방강 선생 또한 최고의 금석학자(金石學者)였다. 추사 선생은 당대 최고의 두 학자와 사제(師弟)의 연을 맺었으며 추사의 호(號) 완당(阮堂)과 보담재(寶覃齋)가 이들 스승에 연원한다.
나는 장천 선생의 휘호를 보며 두 스승과 글과 그림, 필담(筆談)으로 소통하던 추사 선생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이른바 중국(中國)의 대학자들이 변방에서 온 나이 어린 사신 일행과 교류할 수 있었던 근원에는 추사 선생의 해박함과 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젊은 시절의 추사 선생에게 이른바 추사체(秋史體)는 아니었을지라도 버금가는 추사의 글씨를 중국의 대학자들 앞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하셨을 추사 선생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아울러 장천 선생이 ‘아추(亞秋)’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소 과문(寡聞)하여 다른 사람의 호 짓기를 망설여왔는데 장천 선생에게 먼저 ‘아추(亞秋)’를 청하였다. 장천 선생의 고사(固辭)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감동은 그 이상이었다.
휘호를 마치고 먹이 마를 즈음 한 공자연구원의 직원은 제일 먼저 장천 선생의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소장하기를 청하였다. 아마도 장천 선생은 휘호를 교류하는 인사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듯한데 자신의 글씨를 알아보고 제일 먼저 달려 온 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인지 아쉬움이 역력해 보이면서도 그 글을 넘겨주었다. 이후 휘호에 참여한 인사들과 훗날을 기약하며 휘호를 교환하는데 모두가 소중하게 받아들고 감상하는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도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 우호를 위한 휘호 교류였으니 우열을 따지는 것이 예(禮)가 아님을 알지만 넘치는 감정마저 추스를 수는 없었다.
특히 한글로 쓴 ‘공자’ 휘호도 공자연구원의 직원들이 영구히 간직하겠다고 했으니 추후 방문하여 다시 한번 찾아가리라는 다짐도 해 본다. 무엇보다 아쉽게도 공자연구원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한국 공씨(孔氏)의 시조(始祖) 공소(孔紹) 선생의 흉상이 있다고 했는데 휘호 교환의 감격에 겨워 방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추후 다시 방문해야 할 명분도 생겼다.
혹시 앞으로 중국의 취푸를 방문하는 분들이 공자연구원 방문 기회가 있다면 아추(亞秋) 선생의 글씨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문한 유림(儒林)이 공자의 고향 취푸에서 느꼈을 아추(亞秋)에 대한 감동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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