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위치한 쌍계사(雙磎寺)는 저와는 아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먼저 지금으로부터 약 32년 전 여름에 대학 동기와 두 학번 아래의 형과 같이 쌍계사로 들어가 “가훈 써 드립니다”를 붙여놓고, 1주일 정도를 지내다 온 기억이 있고, 또 90년대 후반에 ‘고운 최치원의 서예연구’란 제목으로 석사 논문을 쓰면서 쌍계사 일대를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 약 26~7년 만에 다시 찾은 쌍계사는 몰라볼 정도로 바뀌어 있네요. 특히 쌍계사 경내로 진입하는 초입 마을이 길이 새로 뚫리고 없던 가게들이 많이 생겼네요. 다행히 반가운 건 그 당시 가훈을 써 주면서 하루 세끼를 매일 들락거렸던 쌍계석문(雙磎石門) 바위 앞 <신진식당>이 그대로 있고, 지금은 며느리가 물려받아 운영을 하고 있네요.
쌍계사(雙磎寺)는 통일 신라 시대인 722년(성덕왕 21) 대비화상(大悲和尙)과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사찰로, 처음에는 옥천사라 불렀다가 뒤에 정강왕(定康王)[?~887]이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두 개의 계곡이 만난다고 하여 쌍계사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하동 쌍계사 일주문(雙磎寺一柱門)은 신라 때인 840년(문성왕 2)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쌍계사를 중창하였을 때 처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시대의 사례는 알 수 없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1641년(인조19) 벽암선사(碧巖禪師, 1574~1659)가 쌍계사를 중창할 때 새로 중건됩니다. 이후의 기록은 잘 알 수 없으나 용담선사(龍潭禪師)가 단청 불사를 이루었으며, 1977년 고산선사에 의해 수리되었다고 합니다.
‘삼신산쌍계사(三神山雙磎寺)’와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는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근대 서화가로 이름을 떨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습니다.
의창군 이광의 글씨는 구례 화엄사 일주문의 ‘지리산 화엄사’와 ‘대웅전’ 등. ‘지리산 화엄사’ 편액의 좌측에 ‘황명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창군광서(皇明崇禎九年 歲舍丙子仲秋 義昌君珖書)’라고 쓴 낙관이 있다. 따라서 1636년에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엄사 ‘대웅전’ 해서체 글씨는 하동 쌍계사, 예산 수덕사, 장성 내장사, 서울 조계사 등 전국 각지의 대웅전 현판에 유행처럼 모각됐다.
통도사 금강계단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청학루를 돌아 팔상전 왼편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당에는 '金堂(금당)' 편액을 중심으로 '世界一花祖宗六葉(셰계일화조종육엽)', '六祖頂相塔(육조정상탑)'이라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씨가 좌우에 걸려 있다.
추사가 당시 금당에 살던 만허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써준 글씨로 '세계일화 조종육엽'은 부처님의 근본 진리가 보리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이어져온 것을 뜻한다고 스님들은 풀이한다.
금당 안에는 육조의 정상을 모신 탑이 봉안돼 있다. 법당에 탑을 모신 곳으로는 이곳이 유일하다.
寂默堂(적묵당)과 說禪堂(설선당) 편액은 독립운동가인 회산 박기돈(晦山 朴基敦, 1873-1948)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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