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7일(토)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천은사는 방송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사찰로 입장료 문제로 다툼이 되었던 사찰이다. 그러나 이젠 문화재 관람료 및 주차료조차 받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이 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천년 고찰 네 곳(쌍계사. 칠불사, 화엄사, 천은사)을 연속적으로 둘러보았는데, 예년과는 달리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네 사찰중 가장 포근한 사찰이 천은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무엇보다도 강추하는 사찰이다.
내가 천은사를 최애하는 이유는 조선후기 대표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천은사는 주차장에 들어서면 좌측에 저수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산책 데크를 조성해 놓아 산책을 하며 여유롭게 사찰로 진입하기 좋다. 이 또한 천은사가 좋은 점 하나다.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3)에 덕운선사(德雲禪師)와 인도에서 온 승려 스루가 창건하였고,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 뒤 875년에 보조선사가 이곳에 주석(駐錫)하면서 중축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인 1610년(광해군2)에 혜정대사가 중수하고, 1679년(숙종5)에 단유대사(袒裕大師)가 복원하였는데, 177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775년에 혜암이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고 바꾸자 그 뒤로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현재 2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법당인 천은사 극락보전은 다포양식을 갖춘 화려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천은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보물)는 18세기 한국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은사 [泉隱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극락당전만월용(極樂堂前滿月容)
경각원성무량공(頃刻圓成无量功)
극락보전 맞은 편 보제루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밖으로 보이는 차경을 감상하면서 쉴 수가 있다. 한 여름이라 대형 선풍기까지 들려 놓았다. 천은사의 배려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잠깐 사이 소낙비가 내려 운치가 더해졌다. 잠시 머물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무념무상에 잠길 수 있는 곳,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뜻이리라. 참 좋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무량수각이 그래서 더욱 빛난다.
보제루에서 바라본 풍경
'CI.BI.굿즈.북커버.간판.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액(현판)을 위해 쓴 작품 (4) | 2024.03.28 |
---|---|
대한민국 해군 정지함 (0) | 2024.02.07 |
영화 "서울의 봄" 맥주 콤보. (0) | 2023.11.16 |
LG트윈스 29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 (0) | 2023.11.16 |
"서울의 봄" 영화 타이틀이 나오기까지 (0) | 2023.11.06 |